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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은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든 음모론에 대한 진지한 야유였다. 성당 기사단도 그 예의 하나일 뿐이다. (성단 기사단과 같은 단체가 여전히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단체를 표방하거나, 승계했다는 단체는 있는 모양이다.) 비밀스럽게 전해져 내려오는 무언가를 믿고자 하는 마음은 그게 무엇이든 믿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망상으로 이어진다. 자신들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믿음, 내지는 자신들이 그래야 한다는, 혹은 그렇게 될 거라는 망상. 그러나 그것은 허무하다. 비밀은 비밀일 때에만 의미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누구도 알지 못해야 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비밀을 매개로 유지되는 조직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는 까소봉의 말을 빌어 이렇게 얘기한다. “벨보가 비밀 드러내기를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그들>은 그 비밀이 그만큼 더 위대할 것이라고 믿었다. 벨보가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굳게 벨보가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믿고자 했으니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은 존재하지도 않는 비밀에 의해 유지되는 것인 셈이다.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비밀의 내용이 별 것이 아니라는 두려움, 더 이상 비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으로 비밀을 쫓아다니기만 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움베르토 에코는 결국 현대가 중세, 근대와 무엇이 다를 바 있냐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80년대의 현대를 쓰고 있지만, 2010년대의 현대도 다를 바 없다. 벨보가 애지중지한 아불라피아, 즉 컴퓨터를 매개로 한 현대의 신화도 그 망상과 미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 비밀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비밀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여전하다. 더 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혹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그런 망상. 이 소설이 바티칸 교황청의 맹비난을 받은 이유를 알겠다. 기독교의 믿음이 결국은 그것과 관련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지 않냐는 문제 제기. 그리고 중세 이후 그 믿음을 매개로 은밀한 조직을 통해 행해온 세계 지배의 야욕에 대한 폭로. 그런 것이 이 『푸코의 진자』에는 가득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 장치는 정교하고 현란하지만, 굳이 그걸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굳이 행간을 읽지 않아도 명백하다. 그러나 어쩌랴. 그런 야유를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 세계적 종교의 책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사라져간 종교들, 그 종교가 사이비라 칭하여 지하로 떠돌게 한 다른 믿음들과 다를 게 무엇이랴. 20여 년 전 읽다 포기한 이 소설을 다 읽었다. 그때 얻은 게 없었으니 지금 읽은 것과 비교는 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에코의 소설이 잘만 참으면(혹은 이 책을 번역한 이윤기가 전하는 에코의 말대로라면 ‘준비 운동’을 잘 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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